2025년 7월 13일 대흥교회 주일/가정예배
1. 회개기도 -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기를 기도합시다.
2. 사도신경 고백
3. 찬송 – 46장(이 날은 주님 정하신)
4. 말씀읽기 - 사도행전 13:1
5. 설교
제목 : 진리의 문제와 다름의 문제
교회의 1세대였던 사도들의 퇴장에 이어 사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대가 사도행전 13장부터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13장은 안디옥 교회로 시작합니다. 안디옥 교회란 안디옥에 있는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 이렇게 언급하지 않고 당당하게 안디옥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까지는 예루살렘이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3장을 시작하며 안디옥이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선지자란 교회에서 예언하고 설교하며 교회를 다스리던 일꾼들을 의미합니다. 교사란 말 그대로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와 교사 둘 다 교회를 이끌어 가는 리더들이었습니다. 사도세대를 뒤이어 교회역사의 주인공이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소개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바나바입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자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안디옥에 파송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구브로 출신입니다. 구브로는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큰 섬입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레위족속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입니다. 니게르라는 단어는 흑인을 의미합니다. 흑인이며 이름이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교회의 지도자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 구레네 사람 루기오가 있었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이 있었습니다. 젖동생이라는 의미는 함께 자랐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분봉 왕 헤롯은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조롱했던 헤롯 안디바를 의미합니다. 마나엔의 어머니가 헤롯 왕의 유모였습니다. 아무나 유모가 되는 것은 아니죠. 마나엔 가문이 귀족가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입니다. 사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하다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리더들로 소개된 이들을 통해서 왜 안디옥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 버금가는, 아니 예루살렘 교회를 능가하는 교회사역의 중심지가 되었는 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양성이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역하는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서로의 다른 점을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었던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분열과 다툼이 아니라 화목과 협력을 만들어 내는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였다는 사실을 교회의 리더들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성경을 읽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다양성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는 가치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출신지역이 달랐습니다. 구브로, 아프리카, 구레네, 유대, 길리기아 다소 등 서로 다른 지역출신들이 모였습니다. 출신 지역이 다르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습관과 가치관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좁은 한반도에서도 영남과 호남이 싸우고, 충청이 캐스팅 보드를 쥐고 이런 이야기들이 여전히 들려지고 있습니다. 지역감정으로 인해 나라가 하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라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요. 그런데 안디옥교회의 리더들은 더 다양한 지역 출신이었으면서도 그들은 함께 동역했습니다.
인종도 달랐죠. 아프리칸도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조금씩은 다른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그들이 하나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삶의 상황들도 다양했습니다. 부자도 있었습니다. 귀족들도 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도 있었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노예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삶의 상황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하나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마나엔과 함께 자란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을 핍박한 자였습니다. 마나엔으로서는 교회 공동체에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죠. 그럼에도 교회는 그들을 다 품었습니다. 그들의 과거가 어떻건, 배경이 어떻건 믿음 안에서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데에는 어떤 문제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안디옥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다름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공동체가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다름을 잘 다루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사람들은 파벌 나누기를 좋아합니다. 내 편을 만드는 것이죠. 유대인들 중에서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서로 경쟁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을 구별했죠.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했습니다. 바리새인이 기도한 것처럼 세리가 아닌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여자와 가난한 자와 나병환자들을 차별했습니다. 힌두교와 비슷합니다. 계급을 만들고 끼리끼리 모여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자들과 함께 삶을 나눴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처럼 상류층의 사람들과도 함께 했습니다. 동시에 세리와 창기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다들 기피하는 나병환자들에게 손을 대서 고쳐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 과부와 고아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방여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들과도 교제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파당을 만들어 내는 일에 열심을 낸 반면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함께 삶을 나누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특정한 사람들만이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참된 교회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안디옥 교회처럼요.
그러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을 온전함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웃, 즉 자기 편은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원수는 당연히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편을 나누고 차별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편 가르지 말라는 것이죠. 이웃과 원수를 나누지 말라는 뜻입니다. 세리와 이방인들도 자신들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형제에게는 문안합니다. 이는 편을 가르는 것이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이웃과 원수를 가르지 말아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편을 가르지 않고 모든 사람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온전하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하시다면 자녀된 우리도 온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이며 그럴 때 교회가 온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장면 중 하나는 1907년에 있었던 평양대부흥 운동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였을 뿐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며 한국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평양대부흥의 역사가 차별과 편가름을 회개하고 다름을 인정하며 하나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있기 전 원산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선교를 하던 선교사님들이 모여서 먼저 회개를 했습니다. 선교사님 중에 부흥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던 의료 선교사였던 하디 선교사는 영국인이라는 백인우월주의와 자신의 내면에 있었던 학력에 대한 교만함,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교만함,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인종차별을 성령의 임재로 공개적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선교사이면서도 나와 한국사람들은 다르다. 내가 더 우월하다. 이런 마음으로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선교의 열매가 맺혀질 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회개하였을 대, 즉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가 되었을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역사도 다름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예전에는 남자와 여자를 차별했습니다. 성인과 아이를 차별했습니다. 주인과 종을 차별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았죠. 이것을 원시적인 사회라고 부릅니다. 그러다 의식이 깨어나며 다름을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와 평등을 외쳤습니다. 그로 인해 근대 사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노예해방운동이 있었고 1900년 초부터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름을 인정하며 벽을 허물고 하나가 되었을 때 세상의 역사도 발전했습니다.
물론 지금의 세상은 오히려 퇴행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불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각국의 대통령과 총리가 되어서 세상을 과거로 회귀시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모습이 교회 안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가 더 앞장서고 있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진리의 문제라면 얼마든지 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문제가 아닌 것에서 이웃을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공격합니다. 교회같지만 교회가 아닌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참된 교회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나만 옳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감히 나한테. 이런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나만 옳다고 생각되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준인 거예요. 그 기준에 벗어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박수치는 것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나는 박수치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문제라고 생각하죠. 나는 박수치지 않는 것이 좋아요! 그런데 옆에서 열심히 박수치며 찬양합니다. 왜 저래? 이런 반응이 나오잖아요. 내가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난과 정죄와 차별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될 수 없는 거예요.
참된 교회는 진리의 문제와 다름의 문제를 구별할 줄 아는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름의 문제인데도 마치 진리의 문제인 것처럼 착각하면 공동체에 다툼과 싸움이 생겨납니다. 진리의 문제는 말씀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것들이죠. 다름의 문제는 진리를 추구함에 있어서 택하는 방법에 관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진리의 문제입니다. 찬송은 성도의 마땅한 바입니다. 그 찬송을 위해서 박수를 치는 분들도 있고 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같이 찬양을 하는 데 방법이 다른 것이죠. 이런 것들은 인정해 주면 됩니다. 진리와 다름을 구별하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는 교회로 만들어 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부흥과 아울러 나와 가정에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총이 가득할 줄 믿습니다.
찬송 : 366장(어두운 내 눈 밝히사)
주기도문
기도제목
1.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한 비전으로 교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다음세대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기도하며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다음세대를 중심으로 모든 일들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4. 배윤순장로님, 조순옥전도사님, 서문재안수집사님, 김은경집사님, 주님의교회 박미선사모님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구인회집사님께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또한 아픈 분들이 회복되어 다시 함께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5. 몽골선한이웃교회, 백암전원교회, 디딤교회, 주님의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6. 가정경제가 회복될 수 있도록, 물질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7. 자녀들이 학교에서 믿는 자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전도할 수 있도록, 그로 인해 주일학교가 부흥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