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6일 대흥교회 주일/가정예배
1. 회개기도 -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기를 기도합시다.
2. 사도신경 고백
3. 찬송 – 44장(지난 이레 동안에)
4. 말씀읽기 - 사도행전 12:25
5. 설교
제목 : 다음 세대를 세우는 교회
사도행전 12장에는 사도 야고보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베드로의 도피로 끝을 맺습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베드로를 살리시고, 헤롯왕을 죽이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 있습니다.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이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더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도행전 12장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리고 13장을 시작하기 전에 12장 맨 마지막 말씀을 기록하게 하셨는 데 그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신약에서 역사적 기록들은 복음서와 사도행전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역과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교회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크게 사도행전 1장부터 12장까지와 13장 이후 28장까지의 말씀으로 나뉘어집니다. 중요한 것은 각기 주인공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도행전 1장부터 12장까지의 주인공은 사도들입니다. 특히 베드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부터 마지막장까지는 사도 바울이 주인공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역사의 전환점을 보여줍니다. 사도들의 헌신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이방선교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 중 한 명이 야고보가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가 도피했습니다. 교회를 이끌어 왔던 사도들의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사도행전 13장 이후에도 베드로는 교회의 리더로서 종교회의를 이끌고 복음사역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은퇴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이 베드로의 떠남을 기록한 이유는 더 이상 베드로가 교회역사를 이끌어갈 주인공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냉정할 수 있죠. 아쉬울 수 있죠. 여전히 베드로는 강력한 리더쉽을 가지고 있고, 교회의 핵심멤버 중의 으뜸이었습니다. 따르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베드로를 은퇴시키고 사도 바울을 다음세대의 주인공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바나바와 사울이 마가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갔다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인공을 소개하는 것이죠. 이 세 인물이 첫 선교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과 마가 요한이 교회에서 파송을 받고 선교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의 주인공이 교체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음세대가 교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입니다. 물론 이들도 사도행전 1장에서 12장까지 그 존재를 만만찮게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다음세대였을 뿐입니다. 그러다 베드로의 도피 이후로 교회 역사의 주인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조연이 되었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인공 교체에 대해서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보기에, 사도들이 보기에,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보기에 사울은 좀 미심쩍은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인 자였습니다. 초대교회를 혹독히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회심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나바의 요청으로 안디옥 교회에 와서 성도들을 잘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움을 돕기 위해 구제헌금도 잘 전달한 사람입니다. 그런 다양한 장점들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과 함께 동역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시고 함께 양육한 사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다는 것은 정말 큰 자산이자 자격이었습니다.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은 심각한 결격사유였습니다. 사역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역사와 초대교회의 부흥에 동행하지 못한 사울이 과연 교회의 주인공의 될 자격이 있는가? 주인공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우려 섞인 시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교회의 주인공의 자리를 사울에게 기꺼이 내 주었습니다. 베드로도 인정했습니다. 주연이었다가 조연이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했습니다. 부족한 부분들이 보였겠지만 그것 가지고 브레이크 걸지 않고 인정해 주고 기도해 줬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한 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게 부활하고 오래 계시면 좋을텐데 40일을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후에 승천하셨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사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들이 믿음직스러웠을까요? 아니죠!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딱 40일이 되자 승천하셨습니다. 맡기신 거예요. 다음 세대를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초대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 사도들이었기에, 그런 베드로였기에 사울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 주는 것에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사울이 예수님과 함께 한 경험이 없어도 그들과 성정이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격차에 비하면 사도들과 사울의 차이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격차에도 예수님이 사도들에게 교회의 역사를 맡기셨다면 사도들이 사울에게 다음세대의 주인공 자리를 내 주는 것에는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사울에게 기꺼이 교회의 주인공의 자리를 물려줬습니다.
이렇게 다음세대를 세워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보기에 이삭은 믿음의 분량이 부족했을 거예요.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이삭을 다음세대의 주인공으로 세웠습니다. 모세가 보기에 여호수아는 또 어땠을까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 자체가 너무 위대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과감히 지도력을 이양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 주었습니다. 전임자들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에 후임자들에게 권한을 맡기는 것이 탐탁치 않았겠지만 그들은 과감히 권한을 이양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새로운 리더들이 공동체 안에 세워졌습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세대가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세대의 중요성을 알죠. 다음세대가 결국 공동체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다음세대를 세우는 것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과감하게 권한을 이양해야 합니다. 물론 미덥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음세대가 실수할 수도 있죠. 그럼에도 그들을 믿고 인정해 줘야 합니다. 은퇴한 세대인 나에게 여전히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힘을 가지고 다음세대가 잘 사역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됩니다. 힘이 있다고 전면에 나서게 되면 다음세대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여전히 힘이 있었습니다. 지도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를 위해 힘이 있을 때 기꺼이 뒷자리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돕고 협력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럴 때 다음세대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하나님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가 보여줘야 할 세워짐의 법칙입니다.
우리도 가정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다음세대를 세워가잖아요!. 결혼하면 부부가 가정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러다 자녀를 낳게 되면요? 자녀가 가정의 중심이 됩니다.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에너지를 투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인 나는 못 먹어도 자녀는 잘 먹이게 됩니다. 나는 제대로 옷을 못 사 입어도 내 자식에게만큼은 좋은 옷 사 입힙니다. 자녀들의 미래를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쓰는 것 아까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자녀들을 키워서 다음세대를 세워가는 것이 가족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식이 다른 공동체에서는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자녀들과 손주들은 항상 나보다 먼저인데, 다른 공동체에서는 내가 먼저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세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내가 더 주인공이 되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죽기까지 사명을 가지고 헌신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의 자리에 있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헌신하되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다음세대의 주연들이 그들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나서게 되면 결국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내가 헌신하는 동안에는 공동체가 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물러날 수밖에 없을 때 뒤를 이를 사람이 없는 거예요. 서양의 교회들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저는 가본 적은 없어요. 들어보기만 했습니다. 교회가 어떻다고 하죠? 나이 많은 어르신들 몇몇이 커다란 예배당에 모여 있다고 합니다. 다음세대가 없어요. 결국 교회는 문을 닫게 됩니다. 이단이나 타종교에 예배당이 팔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예배당이 술집에 팔려서 술을 파는 곳이 되기도 한답니다.
우리 안에 지혜가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다른 게 없습니다. 내가 가정에서 자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처럼, 손주들을 위해 기꺼이 내 물질과 시간을 헌신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내가 내 자녀들을, 내 손주들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도 다음세대들을 아끼고 사랑해주면 됩니다. 물론 십계명에 나온 것처럼 네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다. 어르신들을 잘 섬기는 것이 교회가 복받는 길입니다. 거기에 더해서 어르신들이 적극적으로 다음세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는 다음세대에게 리더쉽을 물려줘야 합니다. 물론 미덥지 않죠. 실제로 시행착오를 많이 할 거예요. 그러나 그것 때문에 다음세대에게 리더쉽을 맡겨주지 않으면 다음세대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헌신하는 동안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이 땅에서 영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못 미더워도 참아주고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다음세대가 마음껏 헌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다음세대에 아낌없이 투자를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다음세대에 둬야 합니다. 이전의 교회에서 다음세대를 위해 복음성가를 많이 불렀더니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모르는데 왜 복음성가를 부르냐! 찬송가만 불러라! 교회가 수용했습니다. 결국 예배에 어르신들만 남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예배 전 찬송을 할 때 복음성가 많이 부르잖아요. 저는 교회가 이것을 용납해 주는 것에 정말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따라가기 힘든 찬양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함께 자리해주고 지지해주고 계시잖아요. 내가 좀 힘들어도, 내가 못 누려도 다음세대가 누릴 수 있도록 희생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에서 사도들로, 사도들에서 사도 바울로 다음세대가 이어진 것처럼 이 교회에도 다음세대를 통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 : 574장(가슴마다 파도친다)
주기도문
기도제목
1. 다음세대를 세우기 위한 비전으로 교회가 움직일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다음세대에게 권한을 이양하고 기도하며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다음세대를 중심으로 모든 일들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4. 배윤순장로님, 조순옥전도사님, 서문재안수집사님, 김은경집사님, 주님의교회 박미선사모님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구인회집사님께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또한 아픈 분들이 회복되어 다시 함께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5. 몽골선한이웃교회, 백암전원교회, 디딤교회, 주님의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6. 가정경제가 회복될 수 있도록, 물질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7. 자녀들이 학교에서 믿는 자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전도할 수 있도록, 그로 인해 주일학교가 부흥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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