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18일 대흥교회 주일/가정예배
1. 회개기도 -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기를 기도합시다.
2. 사도신경 고백
3. 찬송 – 33장(영광스런 주를 보라)
4. 말씀읽기 - 사도행전 11:27-30
5. 설교
제목 : 영적인 것, 육적인 것
27절은 그 때에 라는 단어로 시작됩니다. 그 때란 바나바와 사울이 안디옥에서 열심히 교회를 부흥시키고 있을 때입니다. 포용과 용서와 섬김과 사랑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러운 호칭을 얻었을 때입니다. 바로 그 때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선지자란 예언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들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과 더불어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던 직분이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온 이유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마 안디옥교회의 부흥소식을 듣고 축복해 주기 위해서 왔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게 안디옥에 온 선지자 중에 아가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아가보는 사도행전 21장에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잡히고 고난을 당할 것을 예언하기도 했습니다. 선지자로서의 은사가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아가보 선지자가 성령으로 말했습니다. 자기 생각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역할입니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할 뿐입니다. 아직 성경이 다 완성되지 않았기에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전파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가보가 예언한 내용은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천하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언을 했어! 예언대로 됐어! 이게 아닙니다. 흉년이 들었을 때에 교회가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이게 중요한 거예요. 흉년과 같은 재난이 닥치면 부자와 가난한 자 중에 누가 더 힘들어할까요? 당연히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흉년이 들어도 부자들은 이미 쌓아 둔 것이 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에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습니다. 그러다보니 흉년이 들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이 나라도 마찬가지잖아요.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돈 있는 사람들은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누가 힘들어요? 없는 사람들이 힘듭니다. 막막하죠.
그래서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했습니다. 작정할 뿐 아니라 바로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겨서 유대에 있는 장로들에게 구제금을 보냈습니다. 안디옥은 큰 성읍이었습니다. 대도시였습니다. 당연히 안디옥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중에는 먹고 사는 데 걱정없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반면에 유다는 가난한 지역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다에 있는 성도들은 사회적으로 약자들이었습니다. 흉년이 천하에 들었기 때문에 유다에 있는 성도들이 굶어죽을 위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여유가 있던 안디옥의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유다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구제금을 모아서 보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품어 주고 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웃들은 어떠한가?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웃들은 이 흉년에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사랑입니다. 수원에 비가 많이 오면 대한이는 괜찮겠지? 생각해야 합니다. 속초 위쪽 고성에 눈이 내리면 주찬이는 괜찮겠지? 생각해야죠. 청주에 문제가 있으면 요한이를, 대전에 문제가 있으면 준영이를, 논산에 문제가 있으면 규태를, 광주에 문제가 있으면 정윤이를, 포항에 문제가 있으면 관우형제를, 부산에 문제가 있으면 준서를 생각해야죠. 우리 청년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습니다. 나한테 문제가 없으면 상관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청년들이 있는 곳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관심과 사랑이 안디옥교회에는 있었습니다. 자신들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랑이 이 시대에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어려움과 문제가 있을 때 이 상황 속에서 누가 힘들 것인가? 누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인가? 생각하고 실제로 돕는 손길을 전해야 합니다. 자영업하시는 분들이 힘들면 자영업하시는 분들 찾아가서 함께 위로해야 합니다. 가게 하시는 분들이 있으며 적극적으로 그 가게에 가서 매상도 올려주셔야죠. 여름이 되면 어르신들이 힘들어 집니다. 그러면 삼계탕 한 그릇 대접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경조사가 생기면 함께 가서 위로하고 축하해 줘야 합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육아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있는 가정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하고 돕는 관심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이 힘든 시기에 개척교회들이 얼마나 어려울까? 고민하며 무엇이건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도 무엇이 필요할까? 교회의 어려움이 무엇인가? 생각하며 실제로 도울 수 있어야 합니다. 엠티를 가거나 수련회를 갈 때 기도도 하고 후원도 해야죠. 오늘처럼 선교바자회가 있으면 내 물건도 내 놓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야 합니다. 내가 비록 가지는 못해도 선교를 위해서, 선교사님과 선교지를 위해서 함께 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지난 주에 한 성도님이 저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대흥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나요? 그 물음이 얼마나 감사했는 지 모릅니다. 무언가 아이들을 섬기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죠. 이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각각 그 힘대로 부조했습니다. 모든 헌신에는 분수에 맞게 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대로 헌신해야 합니다. 물론 조금 부담이 가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힘대로 하는 거예요. 100만원을 헌신하면 큰 헌신이죠. 그런데 그 사람의 재산이 100조원이라면요. 그것은 힘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1만원의 헌신은 작은 헌신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달에 버는 돈이 100만원이라면 정말 큰 헌신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저 액수를 따집니다. 얼마나 많이 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각각 힘대로 하기를 원하십니다.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각각 힘대로 부조하였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에는 부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부자들은 많은 것으로 부조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적게 부조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많이 부조한 부자라고 자신의 부조한 것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적게 부조한 가난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힘대로 부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도 이런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분수대로 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들은 많이 헌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적게 가진 자들은 적게 헌신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면 돈 천원도 아깝죠. 그러나 하나님의 것이라면 천억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내 이웃의 삶을 살피며 그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내 손을 통해서 물질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움켜쥐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꺼이 나누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것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수 있었습니다. 천하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유다지방에만 흉년이 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교회는 유다지방을 특정하여 부조하고 구제금을 보냈습니다.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가 보내준 바나바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를 섬겼던 사울도 유대인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유대사람들과 예루살렘교회에 마음을 다해 감사했습니다. 당신들이 복음을 전해서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은 예루살렘에 구제금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5장 27절에서‘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상호 호환하는 것으로 봅니다. 일단의 사람들은 영적인 것은 가치가 있지만 육적인 것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에 대한 감사를 육적인 것으로 갚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영적인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육적인 것으로 갚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적인 것에 대한 가치를 말씀하고 그 영적인 것에 대한 감사를 육적으로 것으로 갚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러잖아요. 지난 주중에 어버이날이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 사랑을 말로만 갚으면 되나요? 내가 능력이 없을 때에는 어쩔 수 없지만 능력이 있고 사회생활을 하면 부모님께 육적인 것으로 갚아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로만 때우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했습니다.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보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정말 감사하다면 육적인 것으로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침 오늘이 스승의주일입니다. 교회에서 나를 위해서 열심히 영적인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을 나누기도 하고 기도를 해 주기도 합니다. 나의 영혼을 위해서 마음을 다해 수고하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다라고 하면 영적인 것을 나눠주는 사람들에게 육적인 것으로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말씀으로 섬기는 목회자들에게, 내 자녀를 위해서 말씀과 기도로 섬기는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함께 된 공동체에서 나를 위해 말씀과 기도를 나누는 구역장님들과 큐티 리더들에게, 이 교회에서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 쉬지 않고 기도하시는 권사님들과 성도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육적인 것을 나눠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눔이 아니라 갚는 것입니다. 영적인 빚을 졌기 때문에 육적인 것으로 갚는 것이 마땅합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복음의 빚진 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빚을 갚는 것이 마땅했습니다. 그 마음을 가지고 각각 힘대로 부조를 실행하여 예루살렘교회에 보냈습니다. 생색낼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단지 빚을 갚을 뿐입니다.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내게 주어진 영적인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면서 육적인 것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더욱 풍성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 : 217장(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주기도문
기도제목
1.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는 모습이 있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도울 때 조금 부담이 되는 정도로 힘대로 도울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영적인 것들을 공급해 주는 분들에게 육적인 것으로 갚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4. 배윤순장로님, 조순옥전도사님, 서문재안수집사님, 김은경집사님, 주님의교회 박미선사모님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구인회집사님께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또한 아픈 분들이 회복되어 다시 함께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5. 몽골선한이웃교회, 백암전원교회, 디딤교회, 주님의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6. 가정경제가 회복될 수 있도록, 물질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7. 자녀들이 학교에서 믿는 자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전도할 수 있도록, 그로 인해 주일학교가 부흥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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