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기 위해서(사도행전 10:1)
복음과 구원의 측면에서 사도행전 10장은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 사도행전 10장을 여는 단어가 가이사랴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룻다로 갔습니다. 룻다에서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쳤습니다. 이로 인해 룻다와 사론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다. 마침 욥바에 있는 여제자 다비다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욥바로 가서 다비다를 다시 살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욥바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때 마침 욥바 위쪽 가이사랴에 고넬료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자였습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나타나 마침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가까운 욥바에 있으니 그를 초청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네료의 집안이 구원받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방인 선교의 첫 문이 열렸습니다. 이 모든 것이 유기적인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베드로는 단지 룻다만을 바라봤지만 하나님께서 더 놀라운 구원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사람들은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을 바라보십니다. 사람이 전혀 알 수 없는 일들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획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도무지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이성은 차후에 이해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여기에 두셨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너무 답답하기도 하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가 꼭 인정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미리 준비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백 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 때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죽이라고요? 왜죠? 그러나 아브라함은 왜에 대한 답을 얻기 전에 하나님께는 다 계획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먼저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이 있었기에 이해되지 않는 명령 속에서도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모리아산으로 순종하며 갔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복을 받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미리 준비하시고 계획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거나 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닙니다. 사탄의 함정도 있으니까요.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에는 반드시 구원의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파멸이 아닙니다. 파멸은 사탄의 목적입니다. 남을 무너뜨리고 짓밟는 것을 위해 하나님은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의 역사입니다. 살리기 위함이죠. 그러기에 내 삶이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는 곳을 향해 간다면 멈춰야 합니다. 사탄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구원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신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택한 백성들을 움직이게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에스더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왜 포로민인 에스더가 바사왕국의 왕후가 되었는가? 모르드개가 말한 것처럼 이 때, 즉 구원의 때를 위함입니다. 요셉, 모세, 다윗, 요나 등등의 모든 인물들이 세움을 받은 이유는 생명과 구원의 역사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라고 나에게 생명을 주신 거예요. 생명과 구원의 삶을 살라고 직장과 지위를 주신 것입니다. 가정에 보내신 것입니다. 물질을 주신 거예요.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보내신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생명과 구원이 우리 사역의 목적이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말을 하건 살리는 말을 하게 됩니다. 남을 죽이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깍아내리고 무시하는 말이 아니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자꾸 남을 죽이는 말을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사용하여 생명과 구원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지식과 물질과 지위와 능력과 힘으로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건지고 구원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기꺼이 남을 살리기 위해서, 내게 주어진 것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남이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또 내가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 생명을 주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배반의 두려움 때문에 생명과 구원의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오로지 이웃을 살리기 위해, 구원하기 위해 일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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