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하게 하는 성도(사도행전 9:26-28)
다메섹을 탈출한 사울은 곧장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3년 만의 방문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힘입니다. 전혀 믿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을 나눴던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긍휼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다. 나에게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들, 정말 악하고 못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미워하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깁니다. 저 악한 자가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울도 구원받았습니다.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잔멸하려던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으로 3년 만에 돌아온 사울은 그 자신이 구원의 은혜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과 사귀려고 했습니다. 이제 동역자가 되었으니 동역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다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은 사울의 변화된 모습을 직접 봤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울의 모습이 머리에 박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했고 사울이 제자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위장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곤란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바나바를 사용하셨습니다. 바나바는 사도행전 4장에 처음 등장한 이후 두 번째로 오늘 본문에 등장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처럼 교회 안에서 아름다운 성품으로 인정받는 바나바가 일곱 집사의 명단에는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집사에 뽑히지 못했습니다. 바나바가 일곱 집사보다 못했기 때문인가요? 아니죠. 더 탁월한 일꾼이었습니다. 교회에서도 인정받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나바를 일곱 집사 중 하나로 세우지 않은 것은 은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일곱 집사는 구제를 위해서 세운 일꾼들입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었습니다. 서로 받은 은사가 달랐습니다. 초대교회는 사도들과 일곱 집사만 존중받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처럼 직분이 없는 자들도 영적인 지도자로 존중하는 공동체였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공동체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 우리 대흥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직분은 은사로 인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받은 자들은 그 직분에 맞게 헌신하면 됩니다. 직분자가 되었다고 으스댈 것도 없습니다. 직분자가 안 되었다고 속상해할 것도 없습니다. 바나바처럼 직분이 없어도 직분자보다 더 탁월한 일꾼들이 교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나바가 자신의 은사를 발휘할 기회가 열렸음을 보여줍니다. 3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제자들과 동역하고 싶은 사울, 그러나 그 사울을 의심하며 거리를 두고 있는 제자들, 이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이래서 싸움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많잖아요. 다 자기 입장으로 보면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싸우는 겁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위로의 은사입니다. 화목케 하는 은사입니다. 바로 그 은사를 바나바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갑니다. 사울을 변호했습니다. 그로 인해 28절에 나오는 것처럼 제자들과 함께 동역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먼저는 구원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복받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당연히 복된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복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화목케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나바는 어떻게 위로의 아들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자신의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은 거예요.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에 화목할 수 있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왜 싸우죠? 다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화목의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내 것을 나눔에 있어서 아까와하지 않습니다. 넉넉한 마음을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여줍니다. 용서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럴 때 화목의 일을 이루며,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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