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7일 대흥교회 주일/가정예배
1. 회개기도 -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겨지기를 기도합시다.
2. 사도신경 고백
3. 찬송 – 67장(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
4. 말씀읽기 - 사도행전 13:6-7
5. 설교
제목 : 이름값 하며 살아갑시다
안디옥 교회로부터 선교사로 파송을 받은 바나바와 바울은 가장 먼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를 찾아갔습니다. 섬의 서쪽 번화가인 살라미에서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 즉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렀습니다. 바보는 당시 총독의 관저가 있던 구브로의 행정중심지였습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 바나바와 바울은 온 섬 가운데로 지났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살라미에서 바보로 가면서 구브로 섬을 샅샅이 훑었다는 뜻입니다. 발길이 닿는 모든 곳에서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첫 선교의 열정이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바보에 도착해서 로마 총독인 서기오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총독 서기오 바울 곁에는 궁중마술사인 바예수가 있었습니다. 궁중마술사는 총독에게 고용된 점장이였습니다. 꿈도 해석해 주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도움을 주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예언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무당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의 이름이 바예수라는 것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바는 아들을 의미합니다. 바요나 시몬아 라고 베드로를 부를 때 바요나는 요나의 아들을 의미합니다. 요한의 아들이죠. 눈 먼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바예수는 예수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예수는 여호수아와 같은 이름입니다.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아, 예수 모두 구원자라는 뜻을 가진 이스라엘에서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마술사의 이름이 바예수, 여호수아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그의 부모가 유대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라고 했습니다. 이름 자체에 엄청난 모순이 있습니다. 바예수라는 유대인이 어떻게 마술사일 수 있나요? 점치는 무당일 수 있나요? 율법에 의하면 점치는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우상숭배이며 점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인 바예수는 마술사여서는 안 됩니다. 마술사라는 직업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럼에도 유대인 바예수는 자신의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7절에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예수는 이름 그대로 유대인이었습니다. 서기오 바울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마 로마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이방인과 함께 섞여 산 것입니다. 총독의 궁중마술사로서 바예수는 총독과 다른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셨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율법에 의해서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음식은 율법이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인 바예수는 총독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위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내다 버린 것입니다. 전혀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이름값을 못한 것이죠. 그것이 부끄러웠던지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8절에서는 바예수라는 이름 대신 엘루마라는 이름을 사용했던 것같습니다. 엘루마는 헬라어로 마술사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감춘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처럼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그의 민족이 그가 하는 일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 자체로 심판받을 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나의 이름은?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나는 이름값을 하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이름을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죠. 바예수입니다. 두 번째로는 종족의 이름입니다.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직업이라는 이름입니다. 마술사였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으로는 이름값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뜻과 소망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 이름만 해도 창성할 창, 은혜 은입니다. 창은 돌림자입니다. 그냥 좋은 이름으로 지어주신 것이죠. 그 이름에 맞게 이름값하며 산다는 것이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특히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것일 때, 그 이름은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며 사명이 됩니다. 그 때는 이름값을 해야죠. 아브람에게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사래에게는 사라라는 이름을 주셨죠. 그 이름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열국의 아비와 어미가 되었습니다.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더하셨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 성자 하나님에게 예수라는 이름을 부여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란 이름은 흔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구원자라는 정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자 되셔야 했기에 예수라는 이름보다 더 적합한 이름은 없었습니다. 그 이름값을 예수님은 하셨죠.
하지만 우리들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값을 한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냥 좋은 이름을 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죠. 그럼에도 부모님이 주어주신 이름에 대한 책임감은 있어야 합니다. 이름에 먹칠을 하면 안 됩니다. 뉴스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죄를 짓는 것으로 먹칠을 하는 것이죠. 사기꾼으로, 살인자로, 정치인으로, 사이비로 그 이름 자체가 욕을 먹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잘 살라고, 좋은 마음으로 지어주신 이름을 욕받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다면 선한 일을 통해서 내 이름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의미로 불려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이름이 가지고 있는 의미로 이름값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름 자체로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이름은 종족의 이름입니다. 바예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답게 살아야 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예수는 유대인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처럼 살았습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름값을 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삶의 방향이었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기에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그 이름값을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종족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한민족일 수 있죠. 그러나 그것은 너무 넓은 이름입니다. 좀 더 좁혀 보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유대인은 민족의 이름이기도 했고 유대교라는 종교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종족명으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어울립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앞서 말씀 나눈 것처럼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광고판이 되는 것이죠. 사람들이 내 말과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안식년 동안 여러 교회를 다니며 예배를 했습니다. 지난 주일, 마지막으로 간 교회는 강단에 크게 거룩과 성결이라는 단어를 새겨 놓았습니다. 교회의 지향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과 성결의 삶을 살겠다 라는 다짐이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은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과 성결입니다. 거룩이란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죠. 바예수는 성공과 부라는 세상의 목표대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이름값을 못한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공유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성공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즉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서 유익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이유는 세상보다 더 욕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움켜쥐고 더 많이 섬김을 요구합니다. 높아지려고 합니다. 이름값을 못하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에 합당한 삶이란 거룩과 성결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주장을 고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철저히 나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그런 낮춤의 가장 분명한 표현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 죄로 가득한 그 사람이지만 예수님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성결입니다. 거룩과 성결은 나의 깨끗함을 주장하며 이웃을 정죄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나 자신을 낮추고 내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 속에서 기꺼이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며 사랑하고 섬기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름값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직업도 이름이 됩니다. 바 예수는 마술사라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전혀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일이어야 합니다. 직업에 귀천이 없습니다. 모든 일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합니다. 다만 악한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죄된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믿는 자가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어떤 교회 장로님은 헌금도 많이 하고 헌신도 많이 하는 데 직업이 사창가 포주였습니다. 장로로 세우면 안 되죠. 이름값을 못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당당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이름값 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의 우리의 직분도 우리의 이름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부를 때 직분을 부릅니다. 그럴 때 그 직분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직분에 맞는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목사는 목사다와야 합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교사 등등 많은 직분이 있습니다. 직분을 주신 이유는 충성이죠. 그 직분에 맞게 헌신할 때 이름값을 하는 것입니다. 직분을 받았음에도 그 직분에 맞지 않게 살아간다면 이름값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신 이유는 그 직분에 헌신하는 것을 통해 복을 부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일하는 자에게 삯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들은 충성으로 인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직분에 충성하지 못했기에 바깥 어두운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직분자로서 직분에 맞게 헌신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충성할 때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있음을 깨닫고 충성하는 모든 직분자들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는 자들은 이름값을 하는 자들입니다. 주어진 이름에 맞게 살아감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시는 대흥의 모든 성도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송 : 420장(너 성결키 위해)
주기도문
기도제목
1. 내 이름을 듣는 자들에게 좋은 말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그리스도인답게 거룩과 성결의 삶,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3. 내게 주어진 직분에 합당한 충성과 헌신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4. 배윤순장로님, 조순옥전도사님, 서문재안수집사님, 김은경집사님, 주님의교회 박미선사모님이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구인회집사님께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또한 아픈 분들이 회복되어 다시 함께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5. 몽골선한이웃교회, 백암전원교회, 디딤교회, 주님의교회에 부흥의 역사가 있도록 기도합시다.
6. 가정경제가 회복될 수 있도록, 물질에 어려움이 없도록 기도합시다.
7. 자녀들이 학교에서 믿는 자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며 전도할 수 있도록, 그로 인해 주일학교가 부흥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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