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자(사도행전 12:1-3)
본문 1절의 그 때는 교회가 핍박을 이기고 다시 부흥할 때를 의미합니다. 이 때 헤롯왕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은혜받을 때 더 강하게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자들은 은혜받을 때 더 경계합니다. 헤롯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자 유대인들이 기뻐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헤롯은 베드로도 죽이기 위해 잡아 가뒀습니다. 악을 행한 자를 지지할 때 더 악행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악을 행하는 자 뿐 아니라 동조하는 자들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내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즉 종교지도자들이 악행에 앞장을 섰습니다. 그럴 때 백성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 동조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함께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류역사 속에 나타난 유대인들을 향한 공격들은 죄에 동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열 두 정탐꾼의 경우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을 악평하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슬피 울며 한 지도자를 세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 때에 죄를 지은 것은 열 명의 정탐꾼입니다. 그들의 백성의 마음을 낙담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만 광야에서 죽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동조했던 60만명도 다 광야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게 무서운 거예요. 악을 행한 자만이 아니라 동조한 자, 악에 침묵한 자들까지 함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야고보서 4장 17절에 나온 것처럼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문제없는 것은 아니죠. 적극적으로 악을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선한 일입니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모습이 없다면 그것도 악이고 죄가 됩니다.
그래서 시편 1편 1절에‘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말씀하는 것입니다. 누가 복을 받는 자인가? 악인들이 악한 꾀를 만들어 낼 때 동조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길을 걸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 식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악인이 아닙니다. 내가 죄인이 아닙니다. 내가 오만한 자가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악한 자가 아니예요. 그러나 악한 자 곁에, 죄인들과 함께, 오만한 자 주위에 있게 되는 것만으로도 복이 아닌 화를 당하게 됩니다.
악한 자들과 함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악한 자들에게 힘을 준다는 것입니다. 용기를 준다는 것이죠. 일본이 식민지배로 악을 행할 때 그들이 더 악행하도록 도왔던 자들은 앞잡이들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시대는 어쩔 수 없었다! 말하면 안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폭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똘똘 뭉쳐서 일제의 식민지배를 거부했다면 일본의 악행도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흑인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리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경고했습니다.‘세상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안 하며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물론 악한 자들이 나쁜 놈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악한 자들에게 악을 행할 면허를 주는 사람들은 그들을 방관하는 사람들, 그 곁에서 동조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안 했어. 나는 반대했어! 다만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을 뿐이야. 이것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악한 것이며, 악한 자들에게 힘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주변의 악한 자들, 죄인들, 교만한 자들에게 아닌 것에 대해서 분명히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물론 그로 인해서 내가 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왕따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는 자들을 잔인하게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공격과 비난을 감당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럴 때 시편의 말씀처럼 복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인 선으로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것만이 복받는 자로 나를 만들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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